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로버트 F.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 * [[https://www.politico.com/magazine/story/2018/06/05/rfk-bobby-kennedy-myth-legend-history-218593/|로버트 케네디의 신화]](폴리티코) *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3/jun/06/robert-kennedy-assassination-anniversary|로버트 케네디: 민주당의 배교자, 정치 기회주의자, 정치적 이상주의자...]]([[가디언]]) ||<#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FK CA.jpg|width=100%]]}}} || ||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를 앞두고 유세하고 있는 로버트 F. 케네디''' || 대중에게 흔히 알려져있는 믿음은 [[로버트 F. 케네디]]가 캘리포니아에서 괴한에 의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휴버트 험프리]]를 꺾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천받아, [[리처드 닉슨]]을 꺾고 미국의 제38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케네디가의 저주]]와 맞물려 오늘날에는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닉슨이 낙선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사실상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다만, 역사가들은 실제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도 1968년 대선에서 이겼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편이다. 크게 두가지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첫번째로 [[로버트 케네디]]가 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지명권을 받았을 가능성이 희박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민주당의 대의원단은 민주당 당권파와 실세 정치인들의 영향을 받았고 직접 투표를 통한 경선으로 결정되는 대의원은 극소수였다. 그 극소수의 직선 대의원단마저도 [[유진 매카시]]와의 경쟁으로 양분되어있었던 상태였다. 경선의 흐름 자체도 로버트 케네디에게 불리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분명 인디애나 주 경선의 승리 이후 승기를 잡았으나, 지지율이 점차 떨어져 캘리포니아 경선에서 [[유진 매카시]]에게 밀려 경선 후보직 사퇴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만약 로버트 케네디가 유진 매카시를 극적으로 밀어내고 경선 대의원을 싹쓸이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다수의 대의원은 리처드 J. 데일리 시카고 시장과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에 투표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로버트 케네디가 어찌 어찌 전당대회까지 올라왔더라도 투표로 선출되는 대의원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역사대로 [[휴버트 험프리]]가 대통령 후보 지명권을 받았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두번째로 로버트 케네디가 실제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한들 닉슨을 꺾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로버트 케네디는 흑인과 유색인종 계층에게서 높은 지지를 얻었지만, 정작 백인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백인 노동자들은 주로 험프리나 월리스를 지지했으며 나머지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인 가톨릭, 대학생, 지식인 계층은 [[유진 매카시]]를 더 선호했다. [[리처드 닉슨]]의 당선 이유가 68혁명과 베트남 전쟁에 모두 지친 "침묵하는 다수"를 규합시켰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로버트 케네디]]가 유색인종의 표를 끌어올린다 할지언정 닉슨을 꺾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흑인들은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휴버트 험프리에 '''97%'''의 표를 던졌으므로 흑인의 압도적 지지가 본선에서 로버트 케네디만의 강점이었다고도 볼 수 없다. 특히 1968년 5월 그의 사망 직전 치러진 갤럽의 여러 여론조사에서, 미국 국민의 67%는 그를 기회주의자로 보았고, 25%만이 그의 민주당 후보 지명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휴버트 험프리만큼, 혹은 그보다도 더욱 대중에게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많은 역사가들과 칼럼니스트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오늘날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의 죽음 5~10년 후에 만들어진 이미지이며 1968년의 정치 지형이 결코 로버트 케네디의 당선을 이끌어낼만큼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결국, 결론은 1968년 대선에서 가장 높은 득표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휴버트 험프리]]라는 결론이 된다. 1968년 8월의 양자구도 여론조사에서 로버트 케네디와 지지층이 어느정도 겹쳤던 [[유진 매카시]]조차 42% 대 37%로 오차범위 밖에서 닉슨에게 지지율이 밀렸다. 휴버트 험프리의 10월 지지율 상승이 민주당 기득권 세력의 지지와 반전좌파의 단결이었음을 고려해본다면, 유진 매카시나 로버트 케네디가 선거전 초반에 이점을 취했을 지언정 험프리와 같은 10월 서프라이즈는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도리어 휴버트 험프리보다 더욱 크게 패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1968년 대선이라면 몰라도 1972년, 1976년, 그리고 그 이후의 대선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높다. 그의 동생 [[테드 케네디]]가 2009년까지 민주당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테드 케네디는 미심쩍은 자동차 사고로 여비서를 죽게 내버려뒀음에도 불구하고, 몇차례나 민주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분류되었고 오바마 행정부 때까지 미국 민주당 진보파의 영수로 군림했다. 기회주의자라는 인식은 "여비서 살인범"이라는 이미지에 비해 훨씬 가벼운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1968년 대선은 아니더라도 로버트 케네디가 지속적으로 민주당에서 대권주자로 언급되고 오랫동안 미국 정치에 영향을 끼쳤을 것임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